원어: Olaus Petri
분류: 스웨덴 종교 개혁가
올라우스 페트리 (Olaus Petri, 1493년 1월 6일 ~ 1552년 4월 19일)는 스웨덴의 종교 개혁가, 인문주의자, 역사가입니다. 그는 스웨덴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아 스웨덴에 루터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스웨덴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고, 스웨덴의 역사 기록에도 기여했습니다.
올라우스 페트리는 외레브로에서 대장장이 페테르 올로프손 (Peter Olofsson)과 크리스티나 라르스도테르 (Kristina Larsdotter)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외레브로의 트리비얼 학교 (trivialskola)와 웁살라 (Uppsala)에서 공부한 후, 독일로 건너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Martin-Luther-Universität Halle-Wittenberg)에서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518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페트리는 스트뢴네스 (Strängnäs)의 주교 마티아스 그레게르손 (Mattias Gregersson)의 비서가 되었고, 1520년에는 부제가 되었습니다. 스톡홀름 학살 (Stockholms blodbad) 이후, 그는 스트뢴네스 대성당 학교에서 가르치며 성경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고, 이는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로렌티우스 안드레아에 (Laurentius Andreæ)와 함께 종교 개혁을 지지했으며, 1524년에는 구스타브 바사 (Gustav Vasa)의 부름을 받아 스톡홀름 시의 서기로 일하게 됩니다.
페트리는 고문과 같은 잔혹한 형벌에 반대하며, "고문을 통해 얻은 자백은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스톡홀름의 대성당에서 설교하며 종교 개혁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의 설교는 당시의 낡은 사고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1525년, 페트리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규율을 깨고 스톡홀름의 시민 딸인 크리스티나 (Kristina)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큰 화제가 되었지만, 구스타브 바사는 페트리의 결정을 지지했습니다.
페트리는 1526년 스웨덴 최초의 개혁적 저작인 "Een nyttwgh wnderwijsning"을 발표하며 저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로렌티우스 안드레아에와 함께 스웨덴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1531년에는 구스타브 바사의 재상이 되었지만, 국고 충당과 국방 강화에 힘쓰는 국왕과 달리, 교회 재산을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갈등을 빚었습니다. 페트리는 1533년 재상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페트리는 스웨덴의 고대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등, 국왕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담은 저술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구스타브 바사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올라우스 페트리는 스웨덴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로서, 스웨덴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는 스웨덴에 루터교를 정착시키고, 스웨덴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종교 개혁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의 활동은 스웨덴의 문화, 사회, 정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올라우스 페트리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종교 개혁이라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 개신교의 형성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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