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Aftonbladet
분류: 스웨덴 일간지
아프톤블라데트 (스웨덴어: Aftonbladet)는 스웨덴의 주요 일간지 중 하나로, 저녁 신문 및 웹 신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1830년에 창간되어 스웨덴 언론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프톤블라데트는 1830년 12월 6일 라르스 요한 히에르타 (Lars Johan Hierta)에 의해 창간되었습니다. 창간 이래 다양한 정치적 성향 변화를 거쳤으며, 1960년대 초부터 논설면은 '독립적인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1994년 8월 25일 스웨덴 신문 중 최초로 웹사이트 Aftonbladet.se 를 개설한 이후, 온라인 뉴스 분야에서 스웨덴 내 독보적인 선두 위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신문 발행 외에도 Aftonbladet TV (웹 TV), 팟캐스트 등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19세기 초 스웨덴에서 신문은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지 않은 매체였습니다. 당시 국왕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지면서 자유주의 운동이 성장했고, 1828-1830년 의회는 자유주의 세력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국왕 칼 14세 요한 (Karl XIV Johan)은 왕권을 지지하는 신문들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맞서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아르구스 (Argus) 등의 신문이 발행되었습니다.
라르스 요한 히에르타 는 1823년 의회에서 자유주의 반대파와 교류하며 언론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하다가 1828년 의회 소식을 다루는 릭스닥스티드닝엔 (Riksdagstidningen)을 창간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발판으로 자신만의 신문 창간을 결심했습니다.
1830년 12월, 라르스 요한 히에르타는 아프톤블라데트 를 창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초기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왕권에 반대하는 논조를 취했습니다. 히에르타는 단순히 정치적 논평만 싣는 대신, 국내외 정치 뉴스는 물론 문학, 연극 등 문화 소식과 광고를 포함하여 다양한 독자층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또한, 저녁에 신문을 발행하여 당일 들어온 최신 뉴스를 빠르게 반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높은 임금을 제시하며 당시 최고의 언론인들을 영입했고, 창간 2년 만에 3,000부 이상의 발행 부수로 스웨덴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성장했습니다. 1830년대 말에는 7,500명의 정기 구독자와 함께 총 10만 명에 달하는 독자가 매 호를 읽는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왕권과 보수 세력은 아프톤블라데트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습니다. 시인 페르 다니엘 아마데우스 아테르봄 (Per Daniel Amadeus Atterbom)은 이 신문을 "국민 폭도 신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1812년 법에 따라 신문 발행자는 발행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궁정 재상(hovkansler)은 신문이 "공공 안전에 위험하거나 근거 없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지속적으로 중상모략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 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인드라그닝스막텐, Indragningsmakten)을 가졌습니다.
아프톤블라데트는 발행 허가가 여러 차례 취소되었지만, 히에르타는 명의를 빌리는 방식(bulvan)으로 신속하게 새로운 허가를 얻어 발행을 이어갔습니다. 신문 이름은 ‘다섯 번째 아프톤블라데트 (Det femte Aftonbladet)’, ‘여섯 번째 아프톤블라데트 (Det sjätte Aftonbladet)’ 등으로 계속 바뀌었습니다. 1838년에만 궁정 재상 아우구스트 폰 하르트만스도르프 (August von Hartmansdorff)에 의해 10번이나 발행이 금지되었으나, 발행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검열 권한은 점차 드물게 사용되다가 1844년 의회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던 '스물여섯 번째 아프톤블라데트 (Det Tjugondesjette Aftonbladet)'는 1851년 12월 31일에 발행되었고, 이후 신문 이름은 다시 아프톤블라데트 로 돌아왔습니다.
아우구스트 솔만 (August Sohlman)이 소유했던 1851년부터 1929년까지 아프톤블라데트는 점차 보수적이고 독일 친화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1907년부터 1930년까지는 스웨덴 최초의 컬러 주간지인 브로키가 블라드 (Brokiga blad)를 발행했습니다. 1890년에 시작된 주 2회 발행판은 큰 성공을 거두어, 최대 15만 명의 구독자와 50만 명의 독자를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1902년 아프톤블라데트는 7,000크로나를 들여 자동차와 트레일러를 주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기자들이 더 빠르고 완벽하게 도시 안팎의 사건을 취재하고, 신문을 지점에 신속하게 배포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1932년, 금융가 이바르 크로이게르 (Ivar Kreuger)의 형제인 토르스텐 크로이게르 (Torsten Kreuger)가 아프톤블라데트를 인수했습니다. 이 시기 아프톤블라데트는 '중립’을 표방하며 1932년 집권한 사회민주당 정부를 지지하기도 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는 신생 자유인민당(Folkpartiet)과 연계된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바뀌었습니다. P G 페테르손 (P G Peterson)이 1933년부터 1956년까지 편집장을 맡았습니다.
이 시기 아프톤블라데트는 아돌프 히틀러 의 독일을 지지하며, 히틀러의 유럽 일부 지역 합병을 평화적인 해결책으로 옹호하는 논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은 신문 아프톤티드닝엔 (Aftontidningen)을 창간했습니다.
1956년 10월 8일,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이 토르스텐 크로이게르로부터 아프톤블라데트를 인수했습니다. 이 시기 칼 벤베리 (Karl Vennberg)가 1957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부 편집장을 맡았습니다. 1960년대에는 기록적인 발행 부수를 기록했으나, 1970년대 들어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토르비외른 라르손 (Thorbjörn Larsson)과 롤프 알싱 (Rolf Alsing) 편집장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신문의 내용과 형식을 쇄신했습니다. 100년 동안 스톡홀름 시내 클라라 지구에 위치했던 본사를 떠나 1989년 글로벤 시티로 이전했습니다. 특히 1994년 8월 25일, 아프톤블라데트는 스웨덴 신문 중 최초로 인터넷판을 선보이며 디지털 시대를 선도했습니다.
아프톤블라데트는 현재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뉴스 매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특히 웹사이트 Aftonbladet.se 는 스웨덴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방문되고 가장 많은 페이지 뷰를 기록하는 뉴스 사이트입니다. 이는 신속한 속보 전달과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공에 기인합니다.
소유 구조에서 노르웨이의 시브스테드 미디어 그룹이 대주주이지만,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이 9%의 지분을 보유하며 정치 논설 주간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점은 이 신문의 독립적인 사회민주주의 논조를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아프톤블라데트는 창간 초기 스웨덴의 자유주의 운동을 대변하고 왕권의 검열에 맞서 싸우며 언론 자유의 상징적 역할을 했습니다. 반복된 발행 금지에도 굴하지 않고 발행을 이어간 역사는 스웨덴 언론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현재는 대중적인 성격의 저녁 신문이자 디지털 시대의 선두 주자로서 스웨덴 사회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총연맹(LO)의 지분 참여는 이 신문이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논설면에 반영하는 배경이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아프톤블라데트와 한국 또는 한국인 사이에 직접적인 역사적 또는 현재의 특별한 관련성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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